몇 해 전 배연국 세계일보 논설실장이 ‘김정은의 평화’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서 북한이 외치는 ‘전쟁 없는 세상’은 자유와 인권이 빠진 ‘짝퉁평화’라고 단언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 우리가 김정은의 위장공세에 속아 안보를 허물면 국가는 반드시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기억을 되살려 배 실장의 칼럼을 復棋보면 그는 칼럼 첫머리에서 ‘악마는 전쟁을 좋아하고 천사는 평화를 좋아한다’면서 이 말은 우리가 믿는 상식이라고 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런 일반 원칙이 뒤집히기 일쑤인데 그건 ‘악마가 천사의 언어를 도용하는 일이 흔한 까닭’이라고 했다.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슴속 깊이 박혀있는 본심을 살펴보기보다는 악마의 입만 쳐다보며 열광한다고 했다.

옳은 지적이다.

지금부터 필자가 하고 싶은 얘기는 바로 그런 맥락에서 간능(幹能) 떠는 김정은의 ‘언어전술’에 속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북한은 노동당 창건 75주년을 기념한 열병식에서 새 전략무기들을 선보였다. 열병식에서 공개된 ICBM과 개량형 잠수함발사 탄도 미사일은 ‘다탄두’를 탑재한 듯한 모양새였다.

주목할 점은 남한을 타격하는 무기체계의 개량형 버전도 대거 공개했다는 것이다. 600mm급 초대형 방사포와 북한판 이스칸데르인 Kn-23 탄도 미사일, 북한판 에이테킴스로 불리는 전술 지대지 미사일 등이 대표적이다.

2년 전인 2018년 이후 남북정상회담과 미북정상회담, 그리고 9.19군사합의로 대규모 한미연합훈련이 중단된 상황에서 북한은 미국을 위협하는 수단으로 핵을 개발하고 우리를 직접 위협하는 수단으로는 신형 재래식 전력을 대폭 강화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러나 김정은은 이날 열병식 연설에서 “사랑하는 남녘 동포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보내며 남과 북이 손을 맞잡는 날이 오기를 기원한다”고 했다.

김정은의 가증스런 기만적 언어전술이 아닐 수 없다.

김정은의 이 말이 조금이나마 진정성 있게 비춰지려면 북한이 실질적인 군사 긴장완화에 나서야한다. 특히 서해상에서의 우리 국민 살해 사건에 대한 공동조사를 받아들여 사실 관계를 밝혀야 하는데도 이 부분에 대해선 한마디의 사죄도 없이 천사의 목소리로 대남메시지만 냈다.

물어보자. 다 좋다고 치자. 피살된 우리 공무원이 월북하려했던 것이라고 치자. 그럼 그 공무원은 그런 방법으로 북에 총살을 당해도 되는 것인가. 우리국민인 공무원이 김정은의 총탄에 죽어도 ‘사과통지문’ 한 장이면 다 끝나는 것인가 말이다.

북한 통일선전부라는 데서는 지난 9월 25일 청와대에 보낸 통지문에서 「김정은 동지는 가뜩이나 악성 비루스 병마 위협으로 신고(辛苦)하고 있는 남녘동포들에게 도움은커녕 ‘우리 측 수역’에서 뜻밖의 불미스런 일이 발생해 문재인 대통령과 남녘동포들에게 커다란 실망을 더해준 것에 대해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한다는 뜻을 전하라고 했다」고 밝혔다.

공식 통지문에서 김정은의 발언을 인용해 “대단히 미안하다”라는 표현까지 내놓은 셈이다.

김정은의 그 사과조차 간접화법이었다. 정말로 그런 문구 한 줄이 우리 정부와 여당이 나서서 환영해야하는 ‘이례적’이고 대단한 것이란 말 인가.

정부 여당은 그렇게 어쭙잖은 김정은의 간접화법 사과를 마치 남북평화의 새로운 증거인 양 내세우고 있다.

북의 우리 국민 총살은 우발적인 것이었고 그 사건에 대한 김정은의 신속하고 이례적인 사과는 한반도 평화 구축의지의 발현이라는 것이다.

웃기는 얘기다. 냉정하게 살펴보자.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김정은은 대단히 간능(幹能)한 인물이다. 우리는 그가 언제 어떻게 판을 뒤집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배우지 않았나.

가깝게는 2018년 9월 남북정상회담의 일정과 의제를 협의하는 우리 측 대북특사와 만난 자리에서 김정은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의지에 변함이 없다고 했지만 그동안의 태도로 봐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없었다.

백성을 굶겨 죽이면서까지 핵을 개발한 김정은이 핵무기 없는 한반도를 말하는 건 적반하장이다.

김정은이 핵과 미사일 실험장 폐쇄를 들먹이며 자신들의 선제조치에 국제사회 평가가 인색해 답답하다고 했다.

그러나 그 시설들은 낡을 대로 낡은데다 필요한 실험들을 모두 마쳐 써먹을 대로 써먹은 이제는 더 쓸모없는 시설임을 다들 아는 것인데 또 우리를 속이려했다. 김정은의 간교한 언어 전술에 다름 아니다.

또 하나, 종전 선언얘기를 해보자.

당시 김정은은 종전선언은 한미동맹약화와 주한미군 철수와는 상관없는 것 아니냐면서 종전선언 후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을 풍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김일성 때부터 해온 기만 술책이다.

지금 대다수 국민들은 종전 선언이 유엔사 해체, 주한미군 지위격하 그리고 북방한계선 무력화와 직결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김정은이 종전선언에 목을 매면서도 이런 문재를 한 번도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악마는 전쟁과 동의어로 평화라는 말을 자주 쓴다. 때문에 악마의 독버섯을 넙죽 받아먹어서는 안 된다.

악마의 언어 전술에 속지 않으려면 암호를 풀 듯 정교한 해독능력을 갖춰야 한다.

김정은이 세치 혀로 뇌깔리는 언사에 일희일비하는 반응을 보이면서 정교하게 해독해 내지 못함으로써 김정은의 가슴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진심을 놓친다면 남남갈등이 빚어져 안보가 무너지는 참담한 사태가 벌어질 것이다.

악마가 노리는 것은 우리 내부의 혼란이다. 진실을 외치는 천사가 되레 배척당하면 사회혼란은 극에 달할 것이다.

핵폭탄이 터지기도 전에 독재자가 던진 ‘말 폭탄’에 우리안보의 빙벽이 무너져 내리고 가짜 짝퉁평화가 판친다면 얼마나 참담하겠는가?

그리고 인구 감소에 따른 병력약화에 대응해 첨단 전력을 구축하겠다는 국방개혁은 추진된 지 10년을 넘기고 있지만 그다지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전쟁은 통상 공격자가 방어자보다 3배 이상의 전력을 준비해야하는 법이라고 한다. 따라서 앞으로 대한민국의 국방은 적에게 ‘좌절’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적을 압도하는 능력실현에 초점을 맞춰야한다.

그럴 때 통일협상의 한 축인 북한을 제압할 할 수 있고 그래야 ‘새로운 통일’(New Unification) 달성과 함께 우리가 ‘진짜평화를 구가할 수 있을 것이다.

류근찬

통일이답이다국민운동본부 상임고문

제 17,18대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