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시대 70년을 통해 한반도의 남북에는 서로 대립관계에 있는 자본주의 체제와 사회주의 체제가 각각 성립되어 유지되어 왔다. 그리고 이 두 체제는 공존하기보다 한쪽의 소멸을 전제로 하는 적대관계에 있었다. 그리고 이 문제는 한반도 문제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사적 문제이기도 하다.

20세기를 넘기면서 세계사는 사회주의 국가가 거의 몰락해 가고 초국적 자본이 크게 발달하면서 자본주의가 독주할 것처럼 보이고 있다. 그런가 하면 민족국가 사이의 벽이 낮아지면서 지역공동체들이 발달해 가는 하나의 경향이 있는 한편, 소연방이 무너진 자리에 다시 ‘구식’ 민족주의가 되살아나면서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또 하나의 경향이 있다.

두 가지 경향 중 21세기 세계사에서는 지역공동체가 발달해 가는 쪽이 주된 방향이 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것을 인간애와 평화주의와 역사의 발전논리 등이 주도하지 못하고 초국적 자본이 이른바 자본의 논리로 주도해 갈 가능성도 높아져 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반도 분단의 주된 원인이 동서진영간 냉전에서 비롯된 편의주의적 이해관계의 산물이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한 실마리는 냉전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세계적 차원의 냉전체제는 종식되었고, 한반도 주변 환경도 대결에서 평화로, 갈등과 반목에서 화해와 협력으로 국제질서의 흐름이 바뀌어가고 있다.

한국은 이미 중국·러시아와 외교관계를 수립했고, 북한도 이제는 미국·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물론 주변국들은 한반도의 분단 상황이 그대로 지속되는 것이 자신들의 국익에 유리하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즉 주변 국가들로서 통일한국의 등장이 이 지역의 세력 균형을 변화시킬지도 모른다는 입장에서 한반도 분단 상황이 고착되는 것을 선호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통일한국이 주변국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고 동북아지역의 평화와 공동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줄 수 있다면, 이들도 통일을 반대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반도는 지리적으로나 경제적인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국익을 위해서도 한반도의 안정적인 평화구조를 바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의 통일문제를 둘러싼 주변여건에는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다.

1980년대 말부터 본격화된 사회주의권의 개혁·개방노선은 결국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붕괴라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옴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 지속되어 온 동서 이념대결을 기조로 하는 냉전질서를 와해시켰다.

오늘날 모든 국가들은 탈냉전의 새로운 국제질서 형성과정에서 기왕의 이념적·군사적 대립보다는 화해·협력을 바탕으로 한 평화 증진과 자국민의 복리증진을 위한 경제발전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추세이다.

또한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강대국들은 자국의 이익과 공동관심사에 관해서는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소위 ‘전략적 동반자관계'를 날로 발전시키고 있다. 특히 세계질서의 이러한 변화 속에 이루어진 독일의 통일(1990. 10. 3)은 우리에게 통일의 가능성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동서독과 남북한은 전후 강대국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분단을 강요당했고 동서진영의 냉전적 대결구조가 심화되면서 쌍방 간의 정치적·군사적 대립이 고조되었다는 점에서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다. 독일과 한반도 분단의 기원은 바로 냉전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책임을 져야 할 당사국이자 패전국으로서 연합국에 의한 의도적인 분단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비해 한반도의 분단은 다만 전후처리를 위한 잠정적 조치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반도의 통일이 독일보다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기대와 전망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점에서 남북한은 공히 통일의 역사적 책무를 지고 있는 셈이다.

한편 국제질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대외관계와 남북관계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민족의 분단을 강요했던 국제정치적 요인이었던 강대국 간의 정치·군사적 대립과 이를 촉진했던 냉전적 대결구조는 이미 종말을 고했다.

남북관계에서도 냉전의 잔재인 갈등과 대립이 지속되고는 있지만, 90년대 들어 해빙무드가 싹트기 시작해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화해·협력 기운은 급류를 타기 시작했다.

한국은 오랫동안 적대관계를 유지해 온 옛 소련(1990.9)이나 중국(1992.8)과 외교관계를 수립했고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지역의 냉전적 구조를 적극적으로 풀어 나가고 있다.

남북한은 1991년 9월 유엔에 동시 가입했고 1992년 2월에는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발효시킴으로써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남북 화해·협력을 위한 기본 틀을 마련했다.

북한은 종전에 통미봉남(通美封南) 전략 아래 남북대화 진전에는 성의를 보이지 않고 미국과의 직접관계 개선에만 집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한반도에서 전쟁재발을 방지하고 남북한 평화공존체제를 정착시키며, 교류·협력을 증진시키기 위한 방안의 일환으로 북한을 6자회담의 테이블에 이끌어 내었으며, 대북경수로 건설지원 사업 역시 차질 없이 추진해 나갔었다. 뿐만 아니라 분야별로 남북대화를 꾸준히 시도함으로써 한반도는 이제 분단의 벽을 허물면서 민족간 진정한 화해와 협력의 시대로 진입할 수 있는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다.

물론 탈냉전에 의한 국제질서의 변화는 한반도 평화정착과 통일에 현실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호기가 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지금 북한은 핵으로 무장하고 미사일을 개발해 미국까지 위협하는 상황이어서 미국과 북한의 관계개선이 한반도에서의 평화를 정착하고 통일에 현실적으로 접근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 커다란 문제다.

따라서 4月중에 있을 남북정상회담, 5월이나 6월초에 있을 북·미정상회담의 성과가 한반도에서의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차원에서 우리가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다.

류 근 찬

‘통일이 답이다’ 국민운동본부 상임고문

제 17대, 18대 국회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