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와 <비설거지>

다시 설거지를 시작하면서

비설거지는 누가 할 것인가

절반의 아픔은 누가 치유하나

집사람이 주부습진이 심해 물을 만지지 못합니다. 주부습진이 이렇게 무서운지 몰랐습니다. 손가락 사이사이 검붉은 반점이 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진물까지 납니다. 처음에 몇 번은 목장갑을 끼고 그 위에 고무장갑을 다시 낀 상태로 설거지를 했습니다. 그러다 얼마 지나자 목장갑도 낄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상태였음에도 집사람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병원을 다녀도 낫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제가 우연히 집사람 상태를 알게 됐습니다. 고등학생 아들이 시험 기간임에도 설거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도 저는 술을 얼큰하게 마신 상태였습니다. 엄마를 돕는 아들이 기특해 용돈을 줬습니다. 그래도 아들을 시큰둥한 표정으로 “엄마 손 아픈 거 알아?” 라고 합니다. 그제야 집사람 손이 심각했음을 알았습니다.

시간이 있을 땐 언덕밥도 짓습니다

그 때부터 제가 밥하고 설거지 하는 일, 그리고 빨래도 합니다. 국이나 찌개는 집사람이 옆에서 거들어주면 가능합니다. 간 맞추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밥하는 일은 참 쉽습니다. 물론 집사람과는 밥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집사람은 전기밥솥의 눈금에 의지하지만 전 눈대중으로 합니다. 쌀을 깨끗이 씻은 후 물이 손등에 찰랑찰랑할 정도로 맞춥니다. 그럼 약간은 된듯하면서도 제 입맛에 딱 맞는 밥이 됩니다. 하지만 집사람은 진밥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집사람을 위해 한쪽은 질게 한쪽은 되게 한 언덕밥을 만들어줬습니다. 물론 언덕밥 만들 땐 시간이 좀 있을 때나 가능합니다. 아들 학교 갈 시간이 임박해서는 엄두도 못 냅니다. 그 때는 그냥 된밥으로 온 식구가 다 먹어야 합니다. 전 늘 아침 다섯 시에는 일어나 다섯 시 반쯤에 밥을 먹는 습관이 있어서 아들과 밥을 먹을 땐 그릇 위까지 수북하게 담아 감투밥을 먹고 아들은 잠에서 덜 깨 입맛이 없어 깨죽깨죽 먹곤 합니다.

상실감과 공허함이 정말 컸습니다

지난 12월 19일 밤부터는 술독에 빠져 지냈습니다. 대통령 선거 결과가 점점 윤곽이 드러날 때부터는 모든 것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독재자의 딸이?”

“어떻게 수구보수가?”

날이 어떻게 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와중에도 날은 어김없이 밝아 왔습니다. 다시는 해가 뜰 것 같지 않았지만 해는 또 무심히 떴습니다. 후배 기자들의 눈물을 보다가 애써 눈물을 참아도 봤습니다. 그리고 잠시 자리를 뜨기도 했습니다. 고래고래 소리도 질러 봤습니다. 그래도 상실감과 공허함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입 냄새는 참을 수 있지만 격한 극우발언은

며칠을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일절 신문도 방송도 보지 않았습니다. 무슨 글 무슨 소리도 눈과 귀에 거슬릴 것 같았습니다. 동네 이발소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 주인아저씨의 말을 지금은 도저히 참고 들어줄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특히 면도하면서 시국론을 펼칠 때는 미칠 것 같습니다. 그 분 입 냄새를 참을 수 있지만 일방적인 극우 발언은 참을 수 없습니다. 서걱서걱 거리는 면도날이 섬뜩하게 느껴질 겁니다. “요즘 젊은 놈들 다 죽여야 한다. 에미애비들 교육에 문제가 있다”고 말하는 것도 들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늘 가던 편의점도 가지 않았습니다. 담배 사러 가서 들을 이야기가 뻔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담배는 끊을 수 있어도 그 사장님 생각에는 동조해 줄 수 없었습니다.

책 한 줄도 못 읽고 글 한 자도 쓰지 못 했습니다

책도 읽을 수 없었습니다. 무슨 책도 머릿속에 담을 수 없었습니다. 책을 며칠씩이나 읽지 않아본 기억도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군에서도 야간 근무 후 낮 취침 시간을 쪼개서 몰래 책을 읽다 매 맞던 기억도 납니다. 하지만 지금은 책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글은 더더욱 쓸 수 없었습니다. 생각이 집중되지 않는 상태에서 단 한 줄도 써내려 갈 수 없었습니다. 밥도 계속 먹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술을 마시면서도 안주도 안 먹었습니다. 술에 취해 쓰러져 자고 싶은데 그럴수록 정신이 더 맑아오는 것 같으니 ‘정말 미칠 노릇’이었습니다.

개수통에 설거지 거리만 산더미같이 쌓였습니다

그러다 개수통을 보게 됐습니다. 설거지 거리가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습니다. 밥통도 텅텅 비어있습니다. 생각해 보니 집사람이 많이 아프다고 했던 것도 같습니다. 그리고 아들은 대선 당일 날만 임시휴일로 쉬고 그 주 내내 시험이란 것 같았습니다. 기말고사라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며칠 동안 집안 누구도 내게 설거지 해 달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밥 져 달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아프다고 병원에 데려가 달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아들놈이 아침부터 라면 끓이고 계란 깨 넣는 소리도 멀리서 윙윙거리듯 들렸습니다.

집사람은 남편의 불편한 심사를 고려해서, 그리고 아들은 아빠의 심정을 이해해서 ‘아무 말들도 못 했나’ 봅니다.

눈물 닦고 설거지하고 밥을 해야 합니다

다시 설거지를 해야겠습니다. 눈물을 닦고 아들과 집사람을 위해 밥을 지어야겠습니다. 아픈 집사람에게 밥도 먹이고 아들놈도 따뜻한 아침밥 먹고 학교 가게 해 줘야겠습니다. 다시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아들놈과 집사람과도 우스갯소리도 해야겠습니다. 어머니께 전화도 드리고 크리스마스이브 때는 헌혈도 다시 해야겠습니다. 12월 24일이 헌혈 가능한 날입니다.

내가 이렇게 설거지를 해야 누군가는 비설거지를 할 것입니다.

저처럼 아파했을 많은 이들의 마음 속 비를 걷어내 줄 수 있을 것입니다. 반대쪽에 섰던 사람들의 응어리를 비설거지해야할 것입니다.

▲ 김성수(안팎뉴스 정치부장)